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재키 로빈슨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재키의 형 매튜 매킨지 '맥' 로빈슨도 [[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200m 은메달리스트 출신[* 금메달을 딴 사람이 그 유명한 [[제시 오언스]]이다.]일 정도로 체육인 유전자를 타고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UCLA]]에 진학해 [[미식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육상]] 4개 종목에서 활약하며 모든 종류의 운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은근 저평가받는 부분인데 로빈슨은 역대 [[NCAA]]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을 만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미식축구 선수로서는 1940년 팀에서 패싱, 러싱 야드와 득점 부문 선두를 기록하는 팀의 에이스였고, 멀리뛰기도 1940년 NCAA 대회를 우승하며 (올림픽이 취소되지만 않았더라도) 국대에 뽑힐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농구에서도 1940, 42년 컨퍼런스 득점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만능 스포츠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빈슨은 1940년 야구 시즌에 .097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팀에서 함께 뛰었던 동료들 중에는 [[린 콤튼]]도 있었다. [[밴드오브브라더스]]의 그 사람이다.] 학창 시절에는 오히려 야구를 못 하는 축에 속했다. 타격은 형편없지만 스피드와 수비 능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대학을 떠난 뒤에는 [[뉴 딜]] 시대 청년조직인 NYA(National Youth Administration)에서 체육진흥 업무를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징집되었다. 흑인들로만 구성된 전차부대인 761 전차대대에 장교로 임관했지만, 역시 인종차별과 맞서다가[* 대학 시절 다친 발목의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가다가 흑인은 버스 뒷자리로 이동하라는 버스기사와 시비가 붙어 [[헌병]]이 출동했고, 군사법원까지 가야 했다. 참고로 로빈슨이 탄 군 버스는 인종분리가 철폐된 노선이었으며 이 점이 참작되어 로빈슨의 혐의는 심문 과정에서의 불복종 정도로 축소되었다.] 전선에는 서지 못하고 758 전차대대로 전출된후 1941년 11월에 명예제대하였다. 군대를 나온 뒤 [[흑인대학]] 운동부 직원 등의 일을 하다 [[니그로리그]] 팀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와 계약하며 본격적으로 야구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kakaotv(39753841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